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6월민주항쟁의 마지막 대규모 집단 항거는 6월 26일에 이루어졌다. 전두환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중단시킬 목적으로 종교계 인사들과 시국수습에 관한 간담회를 개최했지만, 항거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동원되어 집회 예정지나 주요 관공서를 경비하고 검문검색을 했으며, 대학 학생회와 동아리 등을 수색했다.

그 외에도 대통령과 당국은 국민평화대행진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 항거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시와 군에서 전개되었다. 공권력이 주목한 곳은 최종 집결지로 예정되었던 파고다공원과 명동성당 일대였다.

1차 집결지들에서도 경찰과 시위대의 공방이 치열하게 펼쳐졌으며, 시민과 학생은 여기저기로 이동하면서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그리고 “직선제 쟁취”와 “한열이를 살려내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고등학생들도 다수가 시위를 벌였고, 밤이 되자 노동자와 직장인도 시위에 동참했다. 국민평화대행진의 전개는 지역에 따라 다소 편차를 보였으나, 자정을 넘겨서까지 진행된 지역들도 있었다.


* 수원 북수동 성당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마친 신부·수녀와 7000여 명의 군중이 수원역으로 행진. 밤 11시 1만여 명의 시민이 수원역에서 집회, 남문시장 안 노점상 50여 명이 자체적 시위 벌이며 학생들에게 동참을 촉구.

* 성남 '성남지역 민주화연합(의장:이해학 목사)'이 '평화대행진' 선포, 3만여 시위대 평화행진, 자정 무렵 해산. 이후 시내곳곳에서 새벽 3시까지 산발적 시위 계속, 중앙파출소 점거. '노동3권 보장', '저임금 박살' 등의 구호 등장.

* 인천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도 1만여 명의 시민·노동자·학생들이 도로를 완전점거한 가운데 시위,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지속, 부평로의 대중집회에서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보고대회 개최.

* 안양 대학생·노동자 4000여 명이 오후 8시경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철야 시위.

* 부산 오후 4시경 신부 70여 명, 수녀 700여 명과 신도 등 2500여 명이 중앙 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 거행. 미사후 가톨릭센터 앞까지 침묵시위. 이후 부산시내 전 지역에서 27일 새벽 2시까지 시위 지속.

* 마산 국민대회에 앞서 경찰책임자와 '무탄무석'을 약속한 후 촛불행진, 다음날 새벽까지 평화적인 시위가 계속됨.

* 대구 4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 유신학원 네거리-반월당 네거리-명덕로터리-수도산 사이의 간선도로 등에서 27일 새벽 1시 30분까지 시위, 가장 격렬한 양상 전개.

* 대전 시내 중앙로, YMCA 앞 원동 4거리, 가톨릭 문화회관 앞, 선화교 등에서 연 인원 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오후 11시 20분경 까지 시위. 경찰은 오후 9시경부터 충남국민운동본부·대전인권위원회·충남민청의 전화를 불통시킴.

* 광주 6시경 원각사 앞, 5·18 유족회·국민운동전남본부 중심으로 2000여 명 시위. 7시경 한일은행 사거리 일대 10만여 명 운집 시위, 27일 새벽까지 산발시위 계속, 26일의 시위는 20~30만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시위.

* 전주 농민·학생·시민 등 2만여 명이 7시에 관철동 네거리를 점거 연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전북본부' 주도하에 '민주헌법쟁취 전북도민평화대행진' 발대식을 갖고 10만으로 늘어난 시위대와 함께 서광중학교 앞까지 대행진을 강행.

* 춘천 명동 입구에서 개최하려던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봉쇄되자 오후 11시20분까지 시내 곳곳에서 산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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