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 시민·학생 1백만여 명, 서울 시청 앞 운집,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

6월 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세브란스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7월 5일 사망했다. 이한열의 최초 사인은 뇌 손상, 중간 선행 사인은 폐렴, 직접 사인은 심폐기능 정지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연세대 학생들은 영안실로 집결했고, 영안실 외부에는 30개 중대의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다. 곧이어 열린 대책회의는 장례의 성격과 방법 그리고 절차와 장지 등을 논의했다. 이후 몇 차례의 회의를 걸쳐 장지는 광주시 소재 망월묘지(구 5·18묘지)로 결정되었고, 교정에는 추모탑을 세우기로 했다.

장례 명칭은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합의되었다. 장례식은 연세대 총학생회가 주관하며, 7월 9일에 개최하기로 했다. 연세대 본관 앞에서 거행되었던 영결식에는 김영삼, 김대중, 문익환, 김승훈, 지선, 백기완, 송건호 등이 참석했다. 장례 행렬은 신촌로터리에서 1차 노제를 지내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2차 노제를 지냈다. 그리고 광주시로 내려와 이한열이 졸업했던 진흥고에서 3차 노제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추도식을 지낸 후 망월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시민과 학생으로 인해 일정이 크게 지연되어 그의 유해가 안장된 것은 한밤중이었다. 한 젊은이가 공권력의 극단적인 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던 이 일이 진정 교훈이 되었다면, 인명경시(人命輕視)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부당한 공권력의 집행으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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