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 추방 결의대회

최루 가스의 고통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전시처럼 최루탄과 그 파편이 사람을 직접 가격하여 신체의 훼손을 넘어 생명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최루탄에 의한 대표적인 피해 사례는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시에 발생한 김주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과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발생한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을 들 수 있다.

시민과 학생은 6월민주항쟁 기간 내내 경찰의 최루탄 남용을 규탄하고, 더 이상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최루탄의 피해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하여 6월 11일 「최루탄 희생자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국민운동본부와 여성단체는 6월 18일 연동교회에서 ‘최루탄 추방 공청회’를 개최했고, 이날을 ‘최루탄 추방 국민결의의 날’로 정했다. 여기에는 최루탄 피해자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

한편, 18일에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진압작전에 계엄군이 투입되면 더 많은 인명이 살상될 것이 명백했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어 우려와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는 전국 16개 도시 247개소에서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20일 비상조치가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유포되었는데, 군대의 이동도 목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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