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농성(1987.06.10-15)

시민과 학생은 6월 10일 서울의 도심지 곳곳에서 ‘고문살인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시위대가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키기도 했으나, 진압작전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을지로와 명동 입구 일대의 시위대는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11일 오전에 명동성당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경찰의 봉쇄와 연행 작전으로 일부만 겨우 성공했다. 명동성당에 잔류한 760여 명의 시위대는 계획과 준비 없이 예기치 않은 농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으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민운동본부)로부터 배척받기도 했다. 정부와 경찰은 농성자들을 연행할 것이라고 수시로 겁박했다. 경찰이 명동성당으로 진입을 시도하거나 최루탄을 투척하는 바람에 명동성당 입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명동성당 인근에서 근무하던 수천 명의 회사원과 사무원들은 경찰의 시위 진압을 규탄했다. 계성여고 학생들은 도시락을 모아 농성자들에게 전달하는 미담을 남겼다. 안기부와 경찰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와 압박을 가하고 프락치를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으나, 천주교계와 농성자들은 굳건히 맞섰다. 6월 14일 농성자의 수는 35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정부는 다음 날까지 해산하는 것을 조건으로 농성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유예할 것임을 통보했다. 6월 15일 농성자들은 2차례에 걸친 투표를 통해 농성을 풀 것을 결정했다. 이들은 ‘명동투쟁 민주시민, 학생일동’ 명의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2만 여 명의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농성을 해제했다.

명동성당


6월민주항쟁과 천주교 명동성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인 1월 18일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 주일 정오미사에서 인권을 유린한 고문행위에 의로운 분노를 느껴야 한다고 강론했다. 1월 26일에는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고 박종철 군 추도미사’가 열렸다. 2월 7일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대회’가 열린 곳도 명동성당이었다. 뿐만 아니라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에서는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사망 사건이 축소ㆍ조작됐음을 폭로했다. 김승훈 신부의 발언이 미친 영향은 실로 컸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5월 26일 국무총리를 비롯해 내각 전반에 대한 개각이 단행되었다. 6월 10일 열린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에서 경찰에 쫒긴 시민과 학생이 명동성당으로 도피했던 것도 천주교계의 역할 및 상징성과 관련이 깊다. 명동성당으로 들어온 시위대는 6월 15일 농성을 해제했다. 6일 동안의 명동성당 농성은 6월민주항쟁에서 매우 의미가 깊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명동성당은 6월 29일 노태우 선언이 있기까지 중요한 항전지가 되었다. 6월민주항쟁 이후에도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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